너의 관심을 원해! - 자도취의 법칙 : <인간 본성의 법칙>

naver 2025년 12월 18일

나를 사랑하는 만큼, 타인을 잃어버릴 수 있다

나는 ‘나르시시스트’라는 단어를 들으면 항상 남이 먼저 떠올랐다.

유난히 자기 얘기만 하는 사람.

칭찬에 목마른 사람.

남을 도구처럼 쓰는 사람.

그런데 자기도취는 일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기본값에 가깝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내가 하루 종일 가장 많이 듣는 목소리는

세상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 머릿속 내 목소리니까.

문제는 그다음이다.

자기도취는 ‘자기애’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종종 자기불안의 다른 이름이다.

내가 흔들릴수록 나는 더 크게 나를 붙잡으려 한다.

그때부터 관심의 방향이 바뀐다.

밖이 아니라 안으로.

사람이 아니라 나로.

. . .

자기도취는 스펙트럼이다

문제는 “나를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관심이 어디에 꽂혀 있느냐”다

자기도취를 없애는 게 목표는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대신 방향을 바꾸는 게 중요하다.

안으로만 말려들면 독이 되고,

밖으로 확장되면 공감이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책에서 네 가지 유형의 자기도취를 보여주는데,

나는 그걸 ‘내 안의 버튼’으로 읽었다.

누구나 갖고 있지만 눌리면 위험해지는 버튼.

. . .

1) 통제광 자기도취자: 스탈린

“내가 통제하지 않으면, 나는 무너진다”

통제광은 화려하지 않다.

차갑다. 그리고 촘촘하다.

이 유형은 관계를 관계로 보지 않는다.

관계를 통제해야 할 시스템으로 본다.

조금만 예측 불가능해져도 불안해지고,

불안해지면 더 조여온다.

의심이 생기면 확인이 아니라 제거로 간다.

물론 우리는 독재자가 아니다.

하지만 내 안에도 작은 스탈린이 있다.

  • 내 방식대로 해야 마음이 놓일 때
  • 맡겼는데 계속 확인할 때
  • 결국 다시 빼앗아오고 싶어질 때

그때 나는 일을 관리하는 게 아니라

불안을 관리하고 있었다.

통제는 능력이 아니다.

가끔은 습관이다.

불안의 습관.

. . .

2) 과장된 자기도취자: 잔 드 벨시엘(잔 데 장주)

“나를 봐줘. 나를 믿어줘. 나를 중심에 세워줘.”

이 유형은 통제 대신 시선을 먹고 산다.

관객이 필요하다.

진짜보다 중요한 건 느낌이다.

사실보다 중요한 건 장면이다.

“내가 얼마나 특별한가”를 증명할 무대가 필요하다.

극장형 자기도취자는 거짓말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존재감이 필요해서 연기한다.

나도 가끔 이 버튼이 눌린다.

  • 성과를 말할 때 연출이 커질 때
  • 조용히 끝내면 허전해서 한 마디 더 얹고 싶을 때
  • 내 이야기를 더 ‘멋지게’ 만들고 싶어질 때

그 순간의 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증명하려는 사람이 된다.

이상하게도, 증명하려 들수록 내 안은 더 비어간다.

화형당한 신부만 불쌍하다.

. . .

3) 자기도취자 커플: 톨스토이와 소냐

“우리 둘 다 사랑을 원하지만, 둘 다 상대를 ‘증명 도구’로 쓴다”

여기서 가장 아픈 건

둘이 악인이 아니라 부부였다는 거다.

서로 사랑했지만 서로를 쉬게 하지 못했다.

둘 다 자기애가 강했고,

둘 다 상대를 통해 자기 자신을 완성하려 했다.

그래서 관계가 따뜻한 집이 아니라 거대한 법정이 된거 아닐까.

  • “너는 왜 내 편이 아니야?”
  • “너는 왜 나를 이해 못 해?”
  • “너는 왜 나를 인정하지 않아?”

사랑이 아니라 자존심의 전쟁.

관계는 ‘누가 옳은가’의 싸움이 되는 순간

둘 다 진다.

왠지 나보고 하는 소리같은 ...

. . .

4) 상대의 기분을 읽는 건강한 자기도취자: 섀클턴

“나는 나를 믿는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마지막은 희망적이다.

자기도취를 없애는 게 아니라

건강한 자기도취로 이동하는 게 좋다는 거다.

섀클턴은 위기 속에서 방향을 바꾼 사람이다.

정복에서 생존으로.

성과에서 사람으로.

내가 감탄한 건 업적이 아니다.

태도다.

건강한 자기도취자는

자기 확신이 강해서 오만한 게 아니다.

자기 확신이 강해서 타인을 볼 여유가 생긴다.

내가 불안하면 나는 나밖에 못 본다.

하지만 내가 단단하면 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게 건강한 자기애의 방향이다.

공감은 단단한 내 안에서 나올 수 있는 시선이고 여유다.

. . .

자기도취는 “자기 사랑”의 문제가 아니다.

관심의 방향 문제다.

안으로만 말려들면 독이 되고,

밖으로 확장되면 공감이 된다.

  1. 지금 내가 통제하려는 건 일인가, 불안인가?
  2. 지금 내가 원하는 건 해결인가, 시선인가?
  3. 지금 이 말은 대화인가, 판결인가?
  4. 지금 이 순간 ‘나’ 말고 ‘우리’에게 필요한 건 뭐지?

나는 완벽히 공감적인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그건 또 다른 자기도취가 될지도 모른다.

대신 내 관심이 다시 나에게만 꽂히려는 순간,

조용히 방향을 바꾸는 연습을 하려고 한다.

나를 사랑하되, 나를 우상화하진 말자.

나는 다친 사람에게 기분이 어떠냐고 묻지 않는다.

내가 직접 그 사람이 되어본다.

월트 휘트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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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s://m.blog.naver.com/soundlife/2241116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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