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경험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죽어본? 적이 없을테니까요.
죽음은 경험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사람 목숨은 하나고, 한 번 뿐인 생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이의 죽음을 보고 알 수 있는 정도 일거라 생각합니다.
장례식장에서 입관하기 전 마지막으로 본 얼굴과, 여전히 부드럽지만 평소와는 다른 너무나 차가운 살결..
화장장에서 관에 들어있는 채로 뜨거운 화염속에서 한시간 반쯤 지나면, 커다란 몸이 정말 한 줌도 안되는 재가 되는 것.
그게 우리가 볼 수 있는 죽음의 모습일 겁니다.
그리고 느낄 수 있는 그 사람의 '부재'.
갑자기 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냐면,
며칠 전, (다행히) 꿈에서 죽은 상태?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보통 꿈을 꾸지 않고 자는 편인데, 이 기억은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생생해서, 그 때 간단히 메모 해둔 내용을 다시 열어 이십여일이 지난 지금서 남겨봅니다.
낮과 밤 평일 주말 없이 정신없이 문제 하나를 붙잡고 정신없이 보내던 8월, 정확히는 8월 12일 밤 자는 도중 겪은 일입니다.
누군가 자고 있던 나에게 '당신은 죽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건, 낯선 사람이 밤중에 가족들 다 자고 있는 내 집에 무단 침입해 들어와 그 말을 하는데, 듣고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왠지 모르지만 그냥 덤덤했다는 겁니다.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보통 저승사자의 역할로 알고 있던 누군가가 나에게 죽었다고 말했고,
가장 처음 든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솔루션 적용한 걸 GitHub에 Push 해놓아 다행이다'
일요일 도서관에 처박혀 디버깅에 몰두하다가 우연히 찾아낸 시그널 맵핑으로 오랫동안 씨름해오던 문제의 해결책을 찾게 되었고, 정말 해결이 된 것인지 테스트들을 해보고 정리해서 월요일 밤에 GitHub 에 Push 해 놓고 개운한 기분으로 잠들었는데, 바로 이런 꿈을 꾸게 되었던 것입니다.
<GitHub 란?>
- GitHub는 프로그래머들을 위한 온라인 협업 공간이에요.
- 문서 작업을 Google Docs에서 같이 하는 것처럼, 코드 작업을 GitHub에서 같이 할 수 있어요.
- 여러 사람이 동시에 같은 프로젝트(코드)를 관리하고, 수정 이력을 자동으로 기록해 주는 코드 전용 저장소 + 협업 툴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 예를 들어 말하면:
- 집단 과제에서 Word 파일을 이메일로 주고받는 대신, Google Docs에 올려놓고 같이 수정하는 것 = GitHub.
- 차이점은, GitHub는 코드에 특화되어 있고, 누가 언제 무엇을 고쳤는지도 정확하게 남는다는 점이에요.
- GitHub에 "push" 한다는 건?
- 내 컴퓨터에서 작업한 파일을 GitHub 온라인 저장소로 올리는 것이에요.
- push는 “내가 수정한 내용들을 중앙 서버(GitHub)에 반영해라”라는 명령이에요.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내 작업을 보고 함께 이어서 작업할 수 있어요.
미쳤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만큼 이 일에만 몰두하며 사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작은 성공이지만 그래도 결국 해냈다는 성취감과 기쁨이 컸다고는 하지만,
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이 그저 github push 해놓아서 다행이라니...
꿈을 꾸고 있는 와중에도 아주 강력한 '현타'가 왔습니다.
그러고나서 가족들이 보이더라고요.
'내가 지금 이렇게 죽으면 안되는데'
아직 나 없이 경제적인 보호막이 잘 갖추어져 있지도 않고, 현재 생활력의 대부분을 나에게 의지하고 있기에, 힘들어질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의 꿈,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들을 이루어가는 중이고, 내 삶의 전성기인 60대를 향해 나는 점점 나아지는 중인데, 여기서 죽는 건 정말 싫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느낀 것 하나는, 죽음은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짜로 저승사자가 와서 나에게 '당신은 죽었습니다' 라고 하는지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는 모르겠지만,
죽는 것 자체는 내가 자살하지 않는 이상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꿈에서 내가 죽었다고 했을 때, 지금 죽는 것이 너무 너무 아쉽지만 내게 허락된 삶이 여기까지면 어쩔 수 없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포기가 아니라 그런 거 있잖아요.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다시 내가 누웠던 자리를 돌아보았는데, 아무것도 없는 거 아니겠어요?
어? 이상하다? 죽었으면 죽은 내 몸이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며 나를 만져보니 만져 졌고요, 옆에 자고 있던 아내를 만져보니 촉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도 믿기지 않아 깨워보니 일어나서 무슨 일이냐고 왜그러냐고 그러더라고요.
그제서야 살아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오늘 아침 걷다가 매미 한 마리가 바닥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치 죽음의 때를 알고 조용히 기다리는 것 같았습니다.
매미가 나무에서 맴맴하고 울지 않고 내려와 있다는 건, 명을 다하고 이제 곧 죽을 것을 의미하겠죠.
수년간 땅속에 있다가 세상에 나와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가량 살지만, 사는 동안 온몸을 다해 울며 자기 할 일을 하고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작년 정확히 딱 이맘때 읽었던 책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 떠올랐습니다.
https://blog.naver.com/soundlife/223568948740

이 책을 읽고 이렇게 썼습니다
최선을 다해 나의 하루를 살고, 사랑한다 말하고, 미안하다 용서를 구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미소지으며 죽고 싶다.
죽었다는 말을 듣고 나서의 나를 돌아보니, 적어놓은 글 중에서 첫번째, 최선을 다해 나의 하루를 사는 것에만 집중했습니다.
나의 하루에 포함된 많은 것들 그 중에서도 내 '일'에만 말이죠.
그것 하나에만 꽂혀 다른 것들은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 버렸고, 그러다보니 장기적인 목표, 더 중요한 것들까지도 잠시 잊어버렸습니다.
사실 다른 더 큰 목표, 비전, 중요한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단 이 것 하나라도 제대로 끝까지 해내고 보자는 '오기'가 저를 여기까지 오게 했습니다.
'오기'라는 감정은 그리 긍정적인 에너지 보다는 부정적인 것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나를 둘러싼 전체적인 에너지가, 힘들고 어렵게 극복하는 과정에서 잠깐씩 맛보는 성취감과 기쁨이 대부분이었다보니, 그렇게 밝고 긍정적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 . .
그랜트 카돈의 <집착의 법칙> 이란 책에서는 간절함에서 나오는 성공을 위한 '집착' '집요함'을 강조하는데, 힘들고 어려움 원래 그것이 기본값인 상태에서 가끔씩 찾아오는 성취의 기쁨과 행복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느껴진다.
중요한 건, 시각화를 통해 끊임없이 목표한 것을 끌어당겼으며, 그 목표에 데려다 줄 기회들을 놓치지 않았고, 그것에 집착해서 결국엔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안도 미후유의 <노잉> 책에서 말한 것처럼 그가 결국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느낌으로 알아챌 수 있었고, 당연히 그렇게 되리라 믿었다.
죽음에 대한 꿈 이야기에서 갑자기 다른 책들이 튀어 나왔는데, 내가 살아있다면 이런 책들과 무관하지 않은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 . .
오늘, 이 순간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나의 하루를 살며,
사랑한다 미안하다 감사한다 말하며 살겠습니다.
+언제나 지금, 여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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